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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생각나는대로

1996년.

by 톰하스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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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그렇다. 아주아주 고리짝 때 얘기다.

 

(아주 우울한 얘기가 가능하니 음악을 틀고 보시는걸 추천한다)

 

https://youtu.be/8Y6tXXIBdY4

 

문민정부라는 숫자로 공화국이 아닌 정권이 이 땅에 나타났으며, 요즘 뉴스에서 핫한 전모씨의 할아버지인 전두환과 그의 친구인 노태우 (전대통령들)의 구속이 있었다.

여의도에 전철이 들어갔으며, 내가 환장해하던 서태지의 아이들이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다 그리고 난 서기회에 들어갔다)

한국 마라톤의 영웅이 이땅에서 화광반조를 하고 사라진 해였고, 

 

지금 세대들은 잘 모를 가수 서지원과 김광석이 사망하였다.

 

그랬다.. 그땐 대한 민국이 그랬다..

 

나?

 

난 2월까지는 재수생이었고, 3월부터 대학생이 되었다.

난 2월까지는 아빠가 있었고, 대학교 입학식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다.

 

1월부터 2월까지 명동과 상계동의 백병원에서 살다시피하고, 그때는 뭔지도 모르는 진통제라고만 알고 있던 모르핀을 달라고 병원 약국문을 울부짖으며 간절하게 두들기는 20살의 어린 아이였다.

 

그리고, 3월이 되고 나선 어른이 되야 했다.

 

언론중재위원회라는 엄청 긴 이름의 회사를 다니시던 아빠가 갑자기 하늘로 가시고 나서부터, 우리 가족의 삶은 모든게 바뀌었다.

 

아빠한테 생활비를 받으면서 나와 동생을 키우던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우리를 키우기 위해서 어디론가 일을 나가셨다.

 

결혼 이후, 전업주부셨던 엄마. 그리고 1996년에는 여자가 경제활동을 잘 하지 않던 시기로 난 기억한다. 보통은 아빠가 벌어 오는 돈으로 식구가 유지되고, 자라나고, 그 아이들이 아이를 낳는 구조였다. 

 

40대중반.. <아.. 지금의 내 나이다..> 의 아무 기술없던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듣기로는 식당에서 일을 하시는 듯 했다. 특별히 물어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정말 아빠의 죽음이 가족의 침묵을 불러왔다.

 

아까 동생이 있다고 했다. 나랑 6살 차이다. 그 '여'동생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있었다.

 

나와 달리 집에서 꾸지람 한 번 받지 않고 모른 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래서 난 그게 조금 부러웠던 아이였다.

 

나에게는 두 명의 가족이 남았고, 지방에 살던 아빠가 살아 있을때는 혈연이었던 친척들은 친구보다 멀어졌다.

 

나는 더이상 아이로 살면 안되었다.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런 선택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그런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난 그렇게 방치가 되었다.

 

고등학교과정을 거치고 운좋게 대학교라는 곳에 소속한 평범한듯하지만, 속으로 곯아있는 아이.  지금 바라보면 이게 나였다.

 

내 학창시절의 기억은 항상 피곤해서 졸거나, 졸다 선생님에게 맞거나 혼나거나 엎드려 있거나 였다. 쉬는 시간만 되면 매점이나, 공하나 들고 운동장 가서 공을 차기 바빴고, 자그마한(뭐 지금도 작지만 그땐 더 작았다) 몸이지만 남들보다 공을 더 쎄게 던진다는걸 알았다. 

 

아빠는 나에게 공부를 아주 아주 잘하기를 원하셨고, 난 그냥 잘하는 수준이어서 그 기대치에 항상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난 내가 공부에 재능이 없는 줄 알았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

 

내 어깨에는 양쪽귀에 이 표식을 화환에 매달린 리본 글씨처럼 써있는 토끼 인형을 매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1996년 이전의 우울한 라떼같은 얘기는 여기서 집어치우자.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추억이야 하면서 웃어 넘길 수 있으니깐.

 

계속해서 1996년의 얘기를 해보자.

 

국가적으로도 변화의 시기였고,

 

내 인생의 선로가 완전히 바뀌는 해이기도 했다.

 

난 그때서야 취미라는것을 가져도 된다는것을 알았고, 학교-집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쓰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것은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돈이라는건 쉽게 벌 수 있다고.. 어른은 그런거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애송이도 아닌 멍청이였다.

 

엄마가 (지금 생각하면) 아주 힘들게 벌어오신 돈으로 용돈을 받고, 나름 과외라는것도 해서 동생에게 가끔 용돈도 주고, 그러다가 취미라는게 생겼다.

 

야구.

 

그때까진 스포츠 신문을 보면서 선동열이 어떠네 장종훈이 어떻네, 양준혁이 낫네, 이종범이 낫네... 방어율/삼진/다승/이닝/타율/홈런/타점/연봉.. 이런걸 왜 그랬는지 다 꿰고 있었다.

 

야구는 보기만 하는 운동이었다. 왜냐고? 아빠가 유일하게 나와 어딘가를 같이 놀러 가준 유일한 장소가 잠실야구장이었다. 선동열을 직관했고(무서웠다. 그 검빨의 선동열은), 대전에서 서울로 상경한 동질감이 있는 OB는 원년 우승 이후에는 그냥 저냥이었지만, 그냥 팬이 되었다. 이렇게 혈연지연은 무서운 것이다.

 

야구 중계도 라디오로 듣던 시절이었다.  공부를 하면서도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 혼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뭐 그랫다... 학교에선 엎드렸고, 집에선 아빠의 불호령이 들리곤 했다.

 

그때는 야구는 선수만 하는 것이었다. 난 그런 재능은 당연히 없었다. 그때쯤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유니텔이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모뎀으로 인터넷을 하는 뭐 그런 서비스였다. 

 

1996년쯤 부터 해서 사회인 야구라는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이 야구를 즐기게 된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누군가 시작했을테고, 누군가 사람을 모았을테고, 나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꺼다. 마음속의 선동열을 품고 말이다.

 

아주 유연히 유니텔이라는 곳에 베어스 팬클럽이 있다는것을 알았고, 거기서 야구팀을 만든다는것을 알았다. 기쁜 마음으로 가입신청을 했고, 내가 처음으로 취미라는 게 생겨났다.

 

기 이후로 군대에 소속된 기간,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라면 쉰적이 없다. 심지어 결혼을 하고 나서도, 첫 애가 무한 도전할때쯤 안나와서 그거 보다가 웃고 혼나고 일요일에 태어났어도, 그리고 산후조리원에 내 아내와 아이가 있어도 난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하고 산후조리원을 갔다. 정말 심한건 백수 생활을 할때에도 아내에게 눈치를 받으면서도 갔다.

 

어찌 생각해보면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다. 무언가에 너무 몰두를 하고나서 다른것을 보지 않으니 말이다.

변론을 해보자면, 마음의 공허함을 그거로라도 채우고 싶었나보다. 왜냐하면 유일한 취미였으니까.. 그리고 그나마 좀 할 줄 안다는 칭찬도 받았으니까.

 

 

 

 

 

1996년 이래로 지금은 2023년이 되었다. 그리고 2023년.. 야구를 쉬게 되었다. 위에 기술한 군대를 간것도 아니고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것도 아니다. 

지금의 내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차 트렁크에 야구 장비가 가득있어도 만져보지도 않는다.

 

내 몸, 영혼의 일부를 도려내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지금도 좀 아쉽고 섭섭하고,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에게 미안하다. 애정이 식어서 그런게 아니고, 내가 몸을 못 움직여서도 아니라서 더 서글프다.

 

 

 

 

나중에 내가 널 다시 되찾아줫으면 좋겠다....

꼭...

살아남아서...

널 다시 되찾아 줄께..

 

잘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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